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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RPG/4-1. TRPG-일반

[TRPG][일반] 어느 TRPG 모임이 망하는 과정

by ZERO0201 2023. 1. 27.

< 어느 TRPG 모임이 망하는 과정 >

'여러분은 여관에 모였습니다.'

 

파이터: "근데 우리가 어디에 있는거죠?"

 

마스터: "시작 전에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은 서쪽 숲의 상인 중 하나에게 고용되었습니다. 도시 근처에서 캐러반을 습격한 자들을 찾고, 증거를 찾아오는 임무지요. 상인은 넉넉한 보수를 약속했고, 절반은 선금으로 제공했습니다. 여러분은 작전을 짜기 위해 한 여관의 라운지에 모여있습니다. 상인은 여러분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라면서, 도시에서 가장 좋은 여관 방을 빌려줬습니다. 세련된 원목 가구로 꾸며진 라운지에는 작은 샹들리에가 조명을..."

 

클레릭: "잠깐만요. 제 캐릭터는 그런 호화로운 곳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제는 청빈함을 미덕으로 보니까요."

 

마스터: "그럴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클레릭은 불만스러운 표정이겠군요."

 

클레릭: "그렇지 않아요. 애초에 제 캐릭터는 그 여관에 들어가길 거부했을테니까요."

 

소서러: "저희들이 왜 만나게 되었는지를 짜는 거였죠?"

 

마스터: "아, 예. 여러분은 서쪽 숲의 여관에 모였고..."

 

클레릭: "제 캐릭터는 모이지 않았다니까요."

 

마스터: "예. 그럼 여러분은 여관 앞에 있습니다. 여기까지 다들 어떻게 모였는지 말해봅시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언제부터 동행했나요? 다들 이 모험에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파이터: "저 먼저 할게요. 제 캐릭터는 싸움을 좋아해요. 그래서... 음... 로그와 예전부터 동행했었습니다."

 

로그: "싸움을 좋아하는거랑 제 캐릭터랑 무슨 상관인데요?"

 

파이터: "왜냐하면 제 캐릭터는 도둑놈을 싫어하거든요. 만나자마자 결투를 선언했고, 때려눕혔습니다."

 

로그: "대체 어떻게 만나자마자 결투 하고 때려요?"

 

파이터: "제가 계산을 해봤는데 평균 데미지를 보면..."

 

로그: "아니 제 캐릭터는 로그잖아요. 결투 자체를 안한다고요. 정 싸운다면 기습하거나 수면가스를 뿌리거나 하겠죠... 그리고 애초에 왜 보자마자 결투를 거는데요?"

 

파이터: "그런 명예 없는 모습에 화가 났었거든요."

 

로그: "아니, 처음 만난 자리라면서요."

 

파이터: "그렇다면 저런 더러운 로그짓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결투를 선언했어요."

 

로그: "제 캐릭터는 탐정이라고요! 이번 일에서 습격자들을 마법도구들로 추적하는 일을 맡기로 했잖아요. 제 시트 읽어보긴 한거예요?"

 

파이터: "올렸어요?"

 

로그: "단톡방에 올렸잖아요. 마스터가 읽으라고 다들 강조했고 본인께서도 읽었다고 말까지 했었잖아요."

 

마스터: "싸우지 마세요. 파이터 PL은 백스토리 짤때 상대 플레이어랑 좀 합의하면서 해보죠."

 

소서러: "로그 PL님은 캐릭터를 너무 방어적으로 굴리시는 것 같은데..."

 

로그: "???"

 

마스터: "흠, 흠. 제가 진행할게요. 음... 차라리 이렇게 된거, 왜 다들 여관에 모였는지 설명하기 전에, 캐릭터 백스토리와 전공, 그리고 목표 같은걸 서로에게 소개하듯 해볼까요? 관객에게 방백하듯이, 캐릭터 연기를 하면서 해봅시다. 어떤 말투고, 어떤 모습인지 서로 보여줘봅시다."

 

클레릭: "여관 안에 안들어갔다니까요."

 

마스터: "예, 여관 입구에 모였습니다."

 

클레릭: "제 캐릭터는 여관 입구에 없을거예요. 저런 건물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니까요. 근처 숲에서 토하고 있을거예요."

 

마스터: "예?"

 

클레릭: "숲에서 토한다구요."

 

마스터: "음... 그건 조금 부자연스럽지 않나요?"

 

클레릭: "제 캐릭터는 그런데요."

 

마스터: "그런가요... 정확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클레릭: "말 했잖아요. 저런 사치스러운 건물만 보면 구역질이 나요. 그래서 토하는 거죠."

 

마스터: "예... 그렇지만 이 곳은 도시예요. 숲까지 가려면 말을 타고도 30분은 걸립니다."

 

클레릭: "그러면 근처 집에 들어가서 변기에 토합니다."

 

소서러: "이 시대에 변기가 있어요?"

 

마스터: "변기가 문제가 아니죠. 다른 사람 집에 쳐들어가는건, 특히 무장한 모험가가 도시의 민가에 쳐들어가는건 범죄예요."

 

소서러: "아니, 변기가 있다는건 상수도 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거잖아요. 이정도 도시에서 그런걸 운영할 수 있다구요?"

 

마스터: "...그럼 요강에 토하는거로 하죠. 그리고 애초에 집에 들어가는건 범죄라니까요."

 

클레릭: "이런 역겨운 도시는 존중하지 않아요. 어쨌던 토합니다."

 

마스터: "그건 범죄라니ㄲ..."

 

로그: "저 전화좀 받고 올게요."

 

소서러: "저희 게임 시작하기 전에 다들 폰 꺼두기로 하지 않았나요?"

 

로그: "그랬었죠. 죄송합니다, 다녀올게요."

 

(로그 퇴장)

 

소서러: "저분 참여 태도에 문제 있지 않아요?"

 

마스터: "뒷담화의 여지가 있는 대화는 하지 말도록 합시다."

 

파이터: "문제가 있으면 고쳐야죠."

 

마스터: "예, 제가 따로 이야기 할테니까, 마저 좀 하려던걸 해볼까요? 그리고 클레릭은 아직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예요. 토하고, 뭐 하고, 그런건 아직 벌어지지 않은거죠."

 

클레릭: "이게 무슨 컴퓨터 게임이예요? 자유도를 이렇게 침해하시면 안되죠."

 

마스터: "자유도는 '침해'라는 단어의 대상이 될만한 개념이 아닌거 같은데요..."

 

파이터: "침해라는 단어의 정의는 동아사전에 따르면..."

 

마스터: "아니, 그러면 클레릭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비대랑 맞서야 한다고요."

 

클레릭: "목격자가 있나요?"

 

마스터: "당장 그 집에 사는 가족들이 있잖아요."

 

클레릭: "신고를 못하게 막으면 되죠?"

 

마스터: "그건 더 큰 범죄잖아요!"

 

소서러: "마스터, 왜 사람한테 윽박을 질러요? 그거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마스터: "아니... 그게... 네, 죄송해요. 그리고 신고를 넣지 못하게 막는다면, 그런식으로 폭력을 행사한 클레릭은 수배될거라구요."

 

클레릭: "경비대에게 돈을 주면 되잖아요."

 

마스터: "무장한채로 가택침입을 한 뒤 거주민들을 억류하고, 수배당하다가 찾아온 법 집행자들에게 뇌물을 주려 시도한다면 그건 정말로 큰 범죄예요. 재판 없이 감금될거라고요."

 

소서러: "너무 오버하잖아요, 마스터."

 

마스터: "이건 오버하는게 아니라..."

 

파이터: "왜요? 찾아오면 싸워서 제거하면 되잖아요. 경험치도 받고 돈도 받고. 경비대원들이니, 맨캐처 같은 구린 무기들을 들고 있을거 아녜요."

 

마스터: "여러분 캐릭터들은 선 성향이예요. 특히 클레릭은 질서선이잖아요."

 

클레릭: "하지만 제 캐릭터가 믿는 질서는 이 도시의 질서랑은 달라요."

 

마스터: "그렇습니까... 아니 그래도 파이터랑 소서러는..."

 

파이터: "스스로를 방어하는게 악행이예요?"

 

마스터: "아니......"

 

소서러: "애초에 재판도 없이 투옥한다면서요. 그 시점에서 경비대는 선한 존재들이 아닌거 같은데요?"

 

마스터: "...일단 하던거 마저 해보면 안될까요? 캐릭터들 자기소개를 해보고, 이야기를 어떻게 진행할지 봅시다."

 

클레릭: "휴... 진짜... 아, 알았어요. 제 캐릭터는 선택을 받은 성녀예요. 교단에서 숭배를 받고 있죠. 사악한 악마들을 수없이 퇴치해본 경력이 있어요."

 

마스터: "네. 열 다섯짜리, 4레벨 클레릭이 어떻게 그런 거대한 위업을 이룰 수 있었는지 말씀해주실래요?"

 

클레릭: "신의 사자들이 내려와서 같이 싸웠어요. 제 캐릭터는 앞으로도 성전을 이어가야 해요."

 

마스터: "캐러반 습격자들을 찾는게 성전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또 신의 사자들이 왜 이번 일은 돕지 않는지 알 수 있을까요?"

 

파이터: "왜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요? 맘에 안들면 그냥 그렇다고 하세요."

 

마스터: "아, 그게 아니라 시나리오랑 조율하려고 보는거예요. 괜찮으시죠?"

 

클레릭: "......"

 

마스터: "아니, 그럼... 저... 일단 말씀하시면 제가 조율안을 드릴게요. 괜찮죠?"

 

클레릭: "...네."

 

파이터: "클레릭과 제 캐릭터는 연인관계예요."

 

마스터: "둘이 연인이라구요?"

 

파이터: "왜요? 둘 다 여자라서요? 여자 캐릭터들끼리는 연인이면 안되나요?"

 

마스터: "아니, 그게 아니라, 클레릭은 아직 열 다섯밖에 먹지 않았고, 순결 서약을 했잖아요."

 

소서러: "처녀성을 유지하니까 상관 없잖아요."

 

마스터: "처녀성이나 순결 서약 같은 것은 단순히 성관계의 유무로 따지는게 아니예요."

 

파이터: "여자끼리는 성관계 못해요? 왜 말을 그딴식으로 하세요?"

 

마스터: "할 수 있다는게 문제잖아요!"

 

파이터: "그딴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마스터가 동성애혐오자인걸 전개에 반영하려 하지 마시라고요."

 

마스터: "제가 왜 동성애혐오자인데요?"

 

클레릭: "...방금 여자랑 여자가 성관게 맺을 수 있다는게 문제라면서요."

 

마스터: "그게 아니라 순결서약 한 클레릭이 성관게를 맺는다는게 문제잖아요."

 

클레릭: "성관계를 맺어야만 연인인가요?"

 

마스터: "아니, 그건 아닌데..."

 

파이터: "그리고, 클레릭이면 여성이 아니게 되나요?"

 

마스터: "그런 말이 아니예요. 제 말 실수에 대해서는 일단 사과를 드릴게요. 그렇지만 굉장히 회색지대가 많은 설정이니까, 좀 바꿨으면 합니다."

 

소서러: "그렇게 혼자 다 할거면 왜 애초에 사람을 모았어요. 캐릭터 시트 짜고 시간을 얼마나 썼는데, 사람 엿먹이는 것도 정도가 있지."

 

마스터: "제가 몇번이나 말하려다 말았는데, 소서러 PL님은 아직 시트도 안짰잖아요."

 

파이터: "그게 중요해요 지금?"

 

마스터: "중요하죠! 오늘 플레이 시작날인데."

 

(로그 입장)

 

로그: "죄송합니다. 급한 전화라... 어디까지 진행됐죠?"

소서러: "진짜! 전 저런식으로 플레이 태도 구린 사람이랑 게임 못하겠어요. 전 가봅니다."

 

로그: "???"

 

마스터: "아니, 면전에 대고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소서러: "뒤에서 말하지 말라면서요. 마스터도 로그 PL 잘못했다고 했잖아요."

 

마스터: "제가 대체 언제요?"

 

소서러: "그러면 말 좀 조심해서 하세요. 전 가볼게요. 플레이 재밌게들 하세요."

 

(소서러 퇴장)

 

파이터: "음... 어쩌죠?"

 

마스터: "...아무래도 제 능력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인 것 같습니다. 일단 플레이는 잠정 중단을 하는게 어떨까 합니다."

 

클레릭: "전 이 플레이 재밌는데요? 계속 하면 안돼요?"

 

파이터: "음, 전 해체에 한표. 애초에 별로 재미도 없었고. 같잖은 이유들 때문에 시작도 못했잖아요."

 

마스터: "그건... 아니, 됐습니다. 알겠습니다."

 

파이터: "가봅니다. 재밌게들 하세요."

 

마스터: "수고하셨습니다..."

 

(파이터 퇴장)

 

클레릭: "음 다들 가시니까 저도 가볼게요."

 

마스터: "예. 들어가세요. 수고하셨습니다."

 

(클레릭 퇴장)

 

마스터: "......"

 

로그: "......"

 

로그: "...저기, 마스터."

 

마스터: "네?"

 

로그: "혹시 제 뒷담화 했어요?"


하이퍼리얼리즘..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픽션을 뛰어 넘는다..

 

TRPG 입문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애초에 같은 팀이고, 같은 파티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플레이어가 있을 수 있다는 걸 몰라서.. 

당연히 함께 플레이하려고 모였으니, 금방 합류해서 파티플레이를 할 줄 알았는데..

자꾸 캐릭터 성향 핑계를 대면서 따로 행동하고 다른 플레이어를 조롱하는 플레이어가 있었는데..

뭔가 하고 싶은 장면이 있거나, 이유가 있겠지, 하고 한 달을 보냈는데..

그냥 기본적으로 깔고 가는 개념 자체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한참 뒤에나 깨달았다.

 

모니터 뒤에.. 또는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있는 사람한테도.. 마음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다. 정말로.. 놀랍지만..

기본적인 예의나 배려가 없는 사람도 있고, 굳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사람도 있다.

(칭찬격려조언 대신 남탓하기, 무안주기, 놀리기, 수치심주기, 곤란하게하기, 싫어하는 행동 계속하기.. 등.. 하..)

팀이 합류하기 힘든 백스토리를 가져온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부분인데..

캐릭터 뒤에 숨어서 캐릭터의 성향이나 설정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고..

다른 플레이어를 적대시 하면서 혼자만 즐거움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도 많다. (ex) 저는 재밌는데요)

TRPG 입문 초반에는.. 그런 사람을 내가 만날 줄 몰랐다.

 

나름 얻은 교훈이라면..

사람 쉽게 믿지 말고.. 의심하고.. 나랑 잘 맞는지 여러번 생각해보고.. 갱생이 불가능해 보이면 빠르게 돔황챠..

참아 봤자, 빨리 터질 팀.. 조금 늦게 터지는 것 밖에 안 된다. 터질 팀은.. 터진다.. 원래 티알팀은 자주 터지는거다.

잘 맞는 사람 만나는게 힘든게 당연하다. 학창시절에 같은 반 친구들 중에 몇명이나 잘 맞았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그리고 취미로 즐거우려고 하는건데.. 즐겁지 않다고 느끼면 언제든 멈춰야 한다.

 

혼자하는 취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취미라.. 무엇보다 사람이 참 어렵다.